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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로마서 10:11-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로마서 10:11-15) 1 사람들은 무언가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특별히 어디에서 좋은 소식이 올 것도 아닌데 하루에 한 번 우편함을 체크해야 합니다. 만일 공휴일이 들어있어서 우편배달부가 안 오는 날이면 왠지 답답함을 느낍니다.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는 이곳 저곳 산골 구석에 사는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다닙니다. 소식을 전하여주기 위하여 다니는 그들의 발이 튼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을 제 때에 전달받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해서, 그들의 모든 수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발에 이상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한국에서처럼 기독교가 단기간 내에 널리 속속들이 퍼지고 기독교 역사 100년만에 전체인구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 된 사례가 없습니다. 이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미국인 선교사들--언더우드(Underwood), 알렌(Allen), 그리고 아펜젤러(Appenzeller) 등의 공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일시적인 부흥운동이 아니라 성경보급을 통한 말씀역사로 말미암아 튼튼한 기초를 쌓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성경보급에 힘쓴 사람들을 '권서(勸書)'라고 부릅니다. ‘권서’는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어 물건을 운반한다는 뜻으로 행상인을 가리켰는데, 그 말이 후에 성경책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 성격책이나 전도 책자를 파는 행상인의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권서’가 시작된 것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될 즈음이었습니다. 만주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Ross)에 의하면, 이 무렵 간행된 복음서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에 반입되었는데 그들은 무보수로 수백 권의 단편성경을 팔거나 배포했습니다. ...

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1 선교사적(宣敎史的) 입장에서 고려해볼 때,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한국이 36년동안 일본에 종속되어있었던 것과 유관하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기독교가 들어가긴 했지만 한국에서와 같이 발전되지 못한 것은 그 나라를 식민지화(植民地化)하려는 나라에 의하여 전해졌기 때문에 민족정신을 깨어주지 못했고 그 식민기간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믿지만 식민기간이 끝남과 함께 기독교에 반감내지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져 갑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을 통하여 전파된 것이 아니라 제삼국인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파된 까닭에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적대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족의식이 고무되고, 일본이 한국인을 돕는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그 자생력을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 출신 선교사님들은, 해서, 한국이 일본에 36년동안 예속(隸屬)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攝理)라고 말합니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고통당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통해 한국의 교회를 성장케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란 말씀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가난으로 하나님을 원망만 하고있는 사람은 그러한 극한 환경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그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작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목사님들의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일군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소수나마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은 마치 어떤 운동팀에서 코치를 고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좋은 코치로부터 좋은 작전을 지시받아 운동경기에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입니다. 그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작전을 그들에게...

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앞서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人間)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남들이 가진 것만큼 갖고 싶어하고 남들이 입는 것만큼 입고 싶어하고 남들이 먹는 것만큼 먹고 싶어하고 남들이 사는 것만큼 나도 그렇게 해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아니, 남들보다 한층 더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믿음생활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큰 욕심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더 많이 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만일 남들보다 신앙이 어떤 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 같으면, 이 사람은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이나 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서 혹은 유학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그렇게 큰 도전(挑戰)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이민와서는 또는 유학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버지니아(Virginia)에서 저와 같이 공부를 하며 교회생활을 하던 대학원생 중에서 80%는 미국에 와서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이 이민와서 혹은 유학와서 교회생활을 하긴 하는데 한국에서 갖고있던 그 열심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이민교회의 남들 하는 만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은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나와의 긴밀한 관계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민교회에는 남들 보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듣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은 ...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1 공부하는 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슬쩍 지나치는 눈길로 책을 보았을 때가 아니라 적어도 여러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할 때입니다. 잠깐동안 책을 보다가 다시 책을 붙잡으면 처음부터 새롭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논문을 쓰려고 할 때,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잠을 자면서도 그 문제를 생각하고 꿈을 꾸기까지 할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얼핏 지나치면서 하는 신앙생활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평생을 지나치는 자세(姿勢)로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은 평생 어린아이의 믿음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 한번 펴보지 않다가 주일 날 먼지가 쌓인 성경책을 툭툭 털어서 갖고오고 목사님의 설교본문 말씀을 찾기 위해서만 성경을 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가 발견될 리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말씀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루에 오분 내지 십분씩 잠깐 잠깐 성경을 읽는 사람이 성경을 전혀 안읽는 사람보다야 낫겠지요. 이 사람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또, 운이 좋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알아질 때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역부족(力不足)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알아야지 믿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알면 알수록 믿어질 수밖에 없고,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긴 보화를 발견하게 되고, 읽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비밀의 경륜(經綸)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목사님이 여러 목사님들에게 권면하기로는 기도의 무릎을 많이 꿇으면 꿇을수록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받는다고 하십니다. 30분이하로 기도할 때는 그것은 단지 나의 바램을 아뢰는 것이지 하나님의...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1 유대인들과 한국인들간에는 비슷한 점들이 많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외세의 영향과 지배를 많이 당하면서 살아온 것,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강하고, 족보를 중요시 여기고, 자녀들의 교육에 정열을 많이 쏫는 것, 미국 땅에서의 삶에서 그들의 직업변천과정-가게 종업원에서 출발하여, 가게 주인이 되고, 자녀들을 의사나 변호사를 시키는 것 등-종교에 열심을 내는 것도 비슷한데, 유대인들이 옛언약인 유대교에 머물러있는 반면,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새언약에서 두드러짐을 보면 현재시점에서는 한국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축복받은 백성이라 할 것입니다. 어떤 학문이나 분야에서건 콧대높은 미국인이 한국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경우가 없는데,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는 한국 신학과 한국교회 성장의 연구에 관한 과목이 있고, 관심있는 미국신학생들이 과목을 택하고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임을 깨닫게 되고, 이들의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란 분이 과연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유프라데스강 하류--지금의 지도로는 이란에 해당하는 곳이겠죠--의 갈대아·우르땅에 아브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아브람아, 아브람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땅과 민족을 주리라.” 아브람은 유프라데스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하란에 이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르(רבע)에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하(ה)를 덧붙여서 된 단어인데 해서,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옴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약속을 ...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1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복권의 윤리성문제를 떠나서, “만일 5백만불 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질문하면 아마 80-90%는 “그중 백만불은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고, 또 얼마는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하며 지키지 못할 사항들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다.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 할 것이다” 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묻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는가?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주님께 바쳐야지. 그런데, 나에게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두 마리라도 바치지. 그런데 나에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지 않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이때 그 사람은 버럭 역정을 내며 “나에게 돼지 열 마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하며 벌떡 일어나 가더랍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환난과 역경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을 지녔던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못될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에 살던 성도들은 많은 숫자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몰려 살았습니다. 로마정부의 눈을 피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지하묘지에 숨어들어서 그곳에서 단체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로운 찬송의 노래도 아직 없었고 성경의 말씀도 아직 없었지만 예수님의 인간구원과 부활을 찬송하고 이를 증거함이 그들의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귀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1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선(破船)된 배에서 몇 가지 물건을 건져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품상자였습니다. 크루소는 그 약품상자 속에 있는 약 가운데서 가장 좋은 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구약’ 곧 성경이라는 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시편 5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 (50:15)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는 측량(測量)의 기준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나? 얼마나 부자가 되었나? 얼마나 높은 지위를 얻었나?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된 횟수가 얼마나 많았나?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나?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가름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나의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횟수가 얼마나 많아졌나로 판가름됩니다. “아-멘”을 잘하는 신자를 보면 목사님이 실수로 틀린 말씀을 하는데도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나 옳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입술에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으로는  “감사합니다”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