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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March, 2025

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1 선교사적(宣敎史的) 입장에서 고려해볼 때,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한국이 36년동안 일본에 종속되어있었던 것과 유관하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기독교가 들어가긴 했지만 한국에서와 같이 발전되지 못한 것은 그 나라를 식민지화(植民地化)하려는 나라에 의하여 전해졌기 때문에 민족정신을 깨어주지 못했고 그 식민기간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믿지만 식민기간이 끝남과 함께 기독교에 반감내지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져 갑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을 통하여 전파된 것이 아니라 제삼국인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파된 까닭에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적대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족의식이 고무되고, 일본이 한국인을 돕는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그 자생력을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 출신 선교사님들은, 해서, 한국이 일본에 36년동안 예속(隸屬)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攝理)라고 말합니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고통당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통해 한국의 교회를 성장케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란 말씀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가난으로 하나님을 원망만 하고있는 사람은 그러한 극한 환경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그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작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목사님들의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일군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소수나마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은 마치 어떤 운동팀에서 코치를 고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좋은 코치로부터 좋은 작전을 지시받아 운동경기에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입니다. 그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작전을 그들에게...

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앞서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人間)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남들이 가진 것만큼 갖고 싶어하고 남들이 입는 것만큼 입고 싶어하고 남들이 먹는 것만큼 먹고 싶어하고 남들이 사는 것만큼 나도 그렇게 해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아니, 남들보다 한층 더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믿음생활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큰 욕심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더 많이 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만일 남들보다 신앙이 어떤 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 같으면, 이 사람은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이나 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서 혹은 유학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그렇게 큰 도전(挑戰)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이민와서는 또는 유학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버지니아(Virginia)에서 저와 같이 공부를 하며 교회생활을 하던 대학원생 중에서 80%는 미국에 와서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이 이민와서 혹은 유학와서 교회생활을 하긴 하는데 한국에서 갖고있던 그 열심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이민교회의 남들 하는 만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은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나와의 긴밀한 관계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민교회에는 남들 보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듣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은 ...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1 공부하는 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슬쩍 지나치는 눈길로 책을 보았을 때가 아니라 적어도 여러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할 때입니다. 잠깐동안 책을 보다가 다시 책을 붙잡으면 처음부터 새롭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논문을 쓰려고 할 때,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잠을 자면서도 그 문제를 생각하고 꿈을 꾸기까지 할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얼핏 지나치면서 하는 신앙생활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평생을 지나치는 자세(姿勢)로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은 평생 어린아이의 믿음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 한번 펴보지 않다가 주일 날 먼지가 쌓인 성경책을 툭툭 털어서 갖고오고 목사님의 설교본문 말씀을 찾기 위해서만 성경을 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가 발견될 리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말씀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루에 오분 내지 십분씩 잠깐 잠깐 성경을 읽는 사람이 성경을 전혀 안읽는 사람보다야 낫겠지요. 이 사람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또, 운이 좋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알아질 때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역부족(力不足)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알아야지 믿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알면 알수록 믿어질 수밖에 없고,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긴 보화를 발견하게 되고, 읽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비밀의 경륜(經綸)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목사님이 여러 목사님들에게 권면하기로는 기도의 무릎을 많이 꿇으면 꿇을수록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받는다고 하십니다. 30분이하로 기도할 때는 그것은 단지 나의 바램을 아뢰는 것이지 하나님의...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1 유대인들과 한국인들간에는 비슷한 점들이 많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외세의 영향과 지배를 많이 당하면서 살아온 것,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강하고, 족보를 중요시 여기고, 자녀들의 교육에 정열을 많이 쏫는 것, 미국 땅에서의 삶에서 그들의 직업변천과정-가게 종업원에서 출발하여, 가게 주인이 되고, 자녀들을 의사나 변호사를 시키는 것 등-종교에 열심을 내는 것도 비슷한데, 유대인들이 옛언약인 유대교에 머물러있는 반면,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새언약에서 두드러짐을 보면 현재시점에서는 한국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축복받은 백성이라 할 것입니다. 어떤 학문이나 분야에서건 콧대높은 미국인이 한국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경우가 없는데,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는 한국 신학과 한국교회 성장의 연구에 관한 과목이 있고, 관심있는 미국신학생들이 과목을 택하고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임을 깨닫게 되고, 이들의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란 분이 과연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유프라데스강 하류--지금의 지도로는 이란에 해당하는 곳이겠죠--의 갈대아·우르땅에 아브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아브람아, 아브람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땅과 민족을 주리라.” 아브람은 유프라데스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하란에 이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르(רבע)에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하(ה)를 덧붙여서 된 단어인데 해서,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옴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약속을 ...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1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복권의 윤리성문제를 떠나서, “만일 5백만불 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질문하면 아마 80-90%는 “그중 백만불은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고, 또 얼마는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하며 지키지 못할 사항들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다.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 할 것이다” 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묻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는가?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주님께 바쳐야지. 그런데, 나에게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두 마리라도 바치지. 그런데 나에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지 않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이때 그 사람은 버럭 역정을 내며 “나에게 돼지 열 마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하며 벌떡 일어나 가더랍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환난과 역경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을 지녔던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못될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에 살던 성도들은 많은 숫자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몰려 살았습니다. 로마정부의 눈을 피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지하묘지에 숨어들어서 그곳에서 단체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로운 찬송의 노래도 아직 없었고 성경의 말씀도 아직 없었지만 예수님의 인간구원과 부활을 찬송하고 이를 증거함이 그들의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귀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믿음의 분량과 은사(恩賜) (로마서 12:3-8) 1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가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坐礁)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선(破船)된 배에서 몇 가지 물건을 건져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품상자였습니다. 크루소는 그 약품상자 속에 있는 약 가운데서 가장 좋은 약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구약’ 곧 성경이라는 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시편 5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 (50:15)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나?” 하는 측량(測量)의 기준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나? 얼마나 부자가 되었나? 얼마나 높은 지위를 얻었나?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된 횟수가 얼마나 많았나?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나?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가름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나의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횟수가 얼마나 많아졌나로 판가름됩니다. “아-멘”을 잘하는 신자를 보면 목사님이 실수로 틀린 말씀을 하는데도 습관적으로 “아멘”을 하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나 옳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입술에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사람의 기준으로는  “감사합니다”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로마서 12:9-13) 1 폴란드에서 출생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1887-1982)은,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쉬면 내 친구가 알고, 사흘 연습을 쉬면 온 청중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 비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신앙생활을 쉬면 내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주 신앙생활을 쉬면 가까이 지내는 교우가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알고,            세 주 신앙생활을 쉬면 온 교회 교우들이 나의 믿음 떨어진 것을 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요 훈련이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4: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했을 때 경기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낼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그 길을 달려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의 연습을 하고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함에 기도로 시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면 이는 연습과 훈련의 몸풀기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다음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예를 들면 집사는 집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 연습과 본분을 잘 감당하고, 교사는 교사로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교우가 있나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 교회 밖에 내가 전도할 대상자가 있나 살펴야 할 것이며, 내가 선교를 직접 감당하지 못할 때 선교를 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생각하고 그들 돕는 일을 실천에 옮김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에 속하...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로마서 12:14-21)        1 음악을 듣는 것이 우리 정서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음악을 좀 더 세분화시켜 말하면,  대중 유행가는 육적인 감각을 만족시키고, 명곡 (클래식)은 정신적인 면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찬송가는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여준다고 합니다. 유능한 음악치료사(Music Therapist)는 찬송가의 심령 치료효과가 높음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찬송가를 치료에 도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예배와 교회교육을 받고 찬송가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되어있다는 연구결과도 이를 뒷바침하여줍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도 예배중에 혹은 가정에서 마음 깊숙히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많이 부르심으로서 육신의 병을 예방하시고, 혹 육신의 질병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병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은 교회 밖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시면 많이 느끼시겠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믿지않는 사람의 삶과 다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거룩한 찬송을 부르지만 돌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의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생활 속의 거룩함과 경건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끼 밥먹고, 옷입고, 아이키우고, 이웃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되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에 따라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약속을 식은죽 먹듯이 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님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옆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배만 채우고 두드리고있는 ...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로마서 13:1-7)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福)은 얼마나 평안한 가운데 풍요로운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렸습니다. 해서, 평안한 가운데 부자의 삶을 살지만 복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환란과 곤고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지만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복있는 죽음은 100세가 넘도록 손자, 증손자, 고손자들과 함께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을 본향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죽음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삼십여세의 나이로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리는 죽음을, 또 바울은 콜로세움에서 몸의 마디 마디가 끊기는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태풍으로, 차사고로, 혹은 비행기 추락등 갑작스런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갑작스런 죽음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중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좋은 왕이나 대통령 혹은 다른 명칭의 위정자 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고, 아니면 극악무도한 위정자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로마서 13:8-10) 1 “사랑의 기본은 관심과  애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이것은 20여년 전 (1997년) 87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소천한 테레사 수녀가 한 말입니다. 5척 단신인 테레사 수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여기며 가난한 자들의 곁을 자기 자리로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몽당연필의 역할을 다마치고 더 나은 본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1910년 8월 27일에 알바니아(마게도냐)의 수도 스코피(Skopje)에서 건축가의 삼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입니다. 18세때(1928년) 집을 떠나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Loretto Order)에 들어가 수녀가 되기 위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때 얻은 세례명이 테레사(Teresa)입니다. 19세때(1929년) 인도 캘커타의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교사로 임명받고 현지에 도착합니다. 27세때(1937년) 수녀가 되기로 최종 서원(誓願)합니다. 36세때(1946년) “가난한 사람들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고 일생을 그렇게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38세(1948년)부터 캘커타에서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하며, 40세때(1950년) 사랑의 선교회(The Order of Missionaries of Charity)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후 50년을 한결같이 가난한 자 가운데 사랑의 천사로서의 생을 보내고 마감합니다. 19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봅니다.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는 그리스도를 돌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남긴 테레사 ...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자다가 깰 때라 (로마서 13:11-14) 1 시간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것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다가 뒤늦게 시간이 참으로 속절없이 빨리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는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 가는 것이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몹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을 알거나 인생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 사람은 시간 사용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7절에서 “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고 말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먼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나 내가 현재 이러한 분야에서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는 식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유행성 사고방식이나 행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인교회 안에서도 무분별하게 범람(汎濫)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한인교회나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가리지 않고 참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무엇을 하였더니 교회가 부흥·성장하였더라 하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떠한 상황가운데 성장하였는지 가리지 않고 그 방식을 도입하여 목회자 자신이 그러한 자질(資質)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적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될 리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러는 나중에 그 성장했다는 교회의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가 나오고 그 내용이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그것이 있기 전까지는 그것이 이단성이든 비성경적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